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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 피아노

성실함으로 업적을 이룬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삶

by 해쉬브라운 2024. 3. 10.

우리에게 음악의 아버지로 알려진 요한 세바스찬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는 모든 시대를 통틀어 작곡가 가운데 최고의 정점을 찍은 사람으로 기억됩니다. 현재 바흐의 위치는 그가 살았던 시대에 누렸던 명성과는 대조적입니다. 그 당시 바흐는 프로테스탄트인 독일에서 오르간 연주의 대가이자 지적인 대위법적 작품을 만든 작곡가로 이름이 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음악이 출판되거나 문헌으로 유통되는 일은 상대적으로 거의 없었습니다. 전 생애의 음악 경력을 볼 때 바흐는 오페라를 제외한 당대의 모든 주요한 양식, 형식과 장르를 포용했을 뿐 아니라 새로운 방식으로 이들을 혼합하고 더욱 발전시켰습니다. 그 결과 음악은 전례 없이 풍부해졌습니다. 비록 일부 18세기 청자들은 바흐의 음악이 시끄럽고 억지스럽다고 보고 그가 죽었을 당시엔 이미 유행이 지난 양식으로 간주했지만, 그 방면의 전문가들에 의해서만은 항상 존중받았습니다. 19세기에 바흐 작품이 부활하고 출판되자 지도적인 음악가에서부터 일반 대중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추종자, 연주자와 청자를 양산하였습니다. 

 

바흐는 일차적으로 자신이 맡은 직무를 해내기 위해 작곡했던 노동하는 음악가였습니다. 아른슈타트와 뮐하우젠의 교회 오르가니스트로 일할 때와 바이마르의 궁정 오르가니스트로 봉직할 때는 대부분 오르간을 위한 작품을 작곡하였습니다. 바이마르에서 악사장에 임명됐을 때는 교회를 위한 칸타타도 작곡했습니다. 공식적인 교회음악을 작곡할 의무가 없었던 쾨텐궁정 음악 감독 시절에는 몇 개의 교육적인 작품과 가정과 궁정의 여흥을 위한 독주, 앙상블 음악이 대부분이었습니다. 4개의 교회음악을 책임지고 있었던 라이프치피에서는 칸타타와 그 밖의 교회음악을 작곡했습니다. 1729년, 라이프치히 콜레기움 무지쿰 감독으로 임명된 바흐의 위치는 협주곡과 실내음악 작품을 쓰도록 했습니다. 바흐가 가르쳤던 많은 개인 학생을 위한 교육용 곡을 포함하여 수많은 오르간과 하프시코드 곡 역시 라이프치히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바흐의 일생에 대해 자주 언급되는 일화를 보면, 음악가들이 자유롭지 못했고 고용주가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밖에 없는 종속적인 관계에 묶여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바흐가 쾨텐의 자리를 받아들이기로 했을 때 바이마르 공작은 처음에 바흐를 보내려 하지 않고 오히려 한 달 동안 감옥에 가두고 나서야 허락했습니다.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 학교의 칸토르와 음악 감독으로 일하고 있을 때는 시 위원회 소속이었기 때문에, 계약상으로 바흐는 모범적인 삶을 살기로 맹세를 해야만 했고 시장의 허락 없이 도시를 떠날 수 없었습니다. 그는 텔레만과 크리스토프 그라우프너 이후로 위원회가 선택한 세 번째 음악가였습니다. 텔레만은 라이프치히에서 받은 제안을 함부르크 주인에게 봉급을 올릴 수단으로 이용하였고, 다름슈타트의 그라우프너 고용주는 사직하겠다는 뜻을 거절하는 대신 봉급을 올려주었습니다. 많은 경우에서 보듯 바흐는 때때로 자신의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 권위에 도전하기도 했으며, 본인의 직책이 지닌 특권을 기반으로 생각한 바가 위원회와 다를 경우 정면충돌도 감당했습니다. 

 

라이프치히에서 바흐가 일하던 상황은 그 시대가 음악가들에게 다각도로 요구하는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이때는 어느 누구도 작곡만으로 먹고살 수 없었습니다. 라이프치히는 약 3만 명의 인구를 가진 번창한 상업도시였고 출판의 중심지이며 1409년에 세워진 독일의 대표적인 대학 본거지였습니다. 성 토마스 학교는 집에서 다니는 학생과 기숙학생 모두를 수용하고 있었고 선택된 소년과 청년들에게는 음악성과 학문적 능력에 따라 50~60개에 달하는 장학금을 지급했습니다. 장학금을 지급받은 것에 대한 보답으로 학생들은 라이프치히의 주요 교회에서 노래하거나 연주를 했고 여타 음악적 의무를 수행했습니다. 칸토르로서의 지위가 바흐에게 요구한 점은 매일 4시간 동안 라틴어와 음악을 가르쳐야 했고 교회 예배음악을 작곡, 필사하고 시연해야 했다는 것입니다. 최고 수준의 합창단을 지도하고 그 외의 3개의 합창단을 감독하는 일도 맡았습니다. 또한 바흐는 일부 성적이 좋은 학생들에게는 악기 연주법도 가르쳐 주었으며, 이들과 도시, 대학교의 연주자들도 포함된 교회 오케스트라를 감독했습니다. 초반에 바흐는 매주 교회를 위해최소 한 개의 주요한 작품을 작곡해야 했지만 그 의무는 시간이 갈수록 느슨해졌습니다. 그러나 도시에서 벌어지는 각종 의식과 대학에서 사용할 음악을 제공하는 일은 여전히 그가 해야 했습니다. 결혼식과 장례식, 그 밖의 특별 행사용 음악을 작곡하거나 이끌어야 할 경우에는 추가로 수당을 받고 일해주었습니다. 이 모든 작업을 통해 그는 중산층에 해당하는 안정된 수입을 받았습니다. 또한 학교 한쪽 익벽에 위치한 가족용 아파트를 제공받았으며, 이곳에서 작곡도 하고 전문적인 도서를 보관할 수 있는 서재도 제공받았습니다.

 

바흐는 성실하고 항상 배우는 작곡가였습니다. 그는 다른 작곡가의 음악을 필사하거나 개작하는 방법을 통해 작품 공부를 할 수 있었고 이를 평생 동안 유지했습니다. 그러했기에 바흐의 작품에서 토렐리, 비발디 등 수많은 작곡가들의 음악을 각색한 것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그는 이태리, 독일, 오스트리아, 프랑스에서 뛰어난 작곡가들의 음악 작곡방법에 익숙해질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음악을 끊임없이 개선하고자 노력했던 사람으로, 자신의 작품을 연주하면서 조금씩 수정하는 일, 좀 더 정교하게 고치는 일을 통해서 그것을 이루었습니다. 바흐의 칸타타 악장 중에는 이전의 칸타타와 기악작품을 비롯해 다른 음악을 개작한 것이 많았습니다. 

 

위 업적들을 보아 그는 평생 성실히 일하며, 가정을 돌보며 삶에 열심히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성실하게 다른 작곡가들에게서 배우며, 맡은 바를 책임지고 수행하였습니다. 그의 성실함과 정직함으로 이룬 업적들이 당시에는 조명받지 못했을 수 있으나, 시간이 지나서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명예로움을 가지기에 합당한 음악가였습니다.